1973년에 이미 1경 3,000조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자산 규모를 자랑하던 록펠러 가문의 흥망성쇠는 4대에 걸쳐 고작 100년 새 이루어졌다.
존 데이비슨 록펠러는 1839년 뉴욕 주 리치포드에서 태어났다. 떠돌이 사기꾼 약장수인 아버지로 인해 가정 형편은 매우 어려웠지만 신앙심이 깊었던 어머니는 10남매에게 정직과 근면, 그리고 절약하는 삶의 방식을 가르켰다. 이런 어머니의 보살핌 속에서 록펠러는 성실하고 총명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16살이 되던 해 그는 휴이트 앤 터틀이라는 곡물 도매회사의 경리로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그 시절 미국은 누구에게나 기회가 열려있었고, 록펠러는 1859년 동료인 모리스 클라크와 함께 ‘클라크 앤 록펠러’라는 회사를 설립해 생필품과 음식을 팔아 엄청난 돈을 벌어 들였다.
뒤이어 약사인 사무엘 앤드루스까지 끌어들여 ‘록펠러 앤 앤드루스’라는 회사를 창업해 1862년 당시 벤처와도 같았던 석유 산업에 뛰어들었다. 당시 미국에선 펜실베이니아주에서 유전이 발견되면서 전국적으로 석유 붐이 일고 있었다. 록펠러는 남들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유전 탐사와 채굴에 열중할 때 부가가치가 더 큰 정제산업에 주목했다. 1867년 헨리 플래글러를 끌어들여 ‘록펠러, 앤드루스 앤 플래글러’라는 회사를 창립해 지역 정유소를 운영하기 시작했고, 이는 록펠러의 인생을 온전히 바꿔놓았다.
남북전쟁이 시작되면서 군수물자의 운송이 필요했고 클리블랜드 인근 타이터스빌에서 유전이 발견되자 석유산업이 급성장하게 되었다. 록펠러는 석유운송과 정유사업의 전망을 예측해 사업확장을 시도하게 된다. 그의 전망은 적중해 석유운송 사업에서 큰돈을 벌게 되었고, 1870년에는 자본금 100만 달러의 스탠더드오일을 창업하기에 이르렀다.
자본의 흐름을 읽는 눈을 가졌던 록펠러의 승승장구는 계속되었다. 하지만 이런 성공의 이면에는 모든 경쟁사를 무너뜨린 독점자본가라는 악명이 꼬리표처럼 따랐다. 그는 불황기에 철도와 석유사업자 간의 카르텔을 구성해 운송료와 석유산업의 마진을 조정했고, 이 카르텔에 들어오기를 거부하는 사업자는 시장에서 퇴출시키는 전략을 통해 미국 석유시장의 95%를 장악했다. 결국, 록펠러로 인해 미국에 독점금지법이 생기게 되었고, 1911년 미국 연방법원은 끝내 스탠더드오일의 해체를 명한다. 이 과정을 거쳐 세계 역사상 가장 거대했던 이 석유 독점기업은 34개의 회사로 분할되었다.
록펠러의 스탠더드오일 지분은 1896년에 4,000만 달러 규모였으나 그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1897년에는 2억 달러로 늘어났다. 독점금지법 위반 판결로 회사가 해체된 후에는 주가가 더욱 올라 1913년에는 10억 달러의 재산을 갖게 된다.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면 사상 최고의 부자가 된 것이다. 실제로 1998년 <포브스>는 미국 역사상 최고 부자로 록펠러 1세를 꼽았다.
1933년 대공황 당시 록펠러 1세가 맨해튼 한복판에 70층 높이로 세운 록펠러센터는 20세기 미국의 번영과 자본주의를 상징할 뿐 아니라 록펠러 가문의 성공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건물이기도 하다. 그동안 57층을 사용해오던 록펠러재단이 이 곳을 떠났다.
록펠러재단은 그동안 각종 자선사업과 기부 등으로 재산을 탕진해왔다. 물론, 선대의 영광을 이어가지 못한 후대의 무능함과 7대를 이어오며 가문의 인원만 300여 명이 된 것도 영향을 주었다.
사실 몰락이라는 표현은 어패가 있을 수 있다.
현재 록펠러가문의 전체 재산은 100억 달러로, 미국 내 부호 가문 중 24위를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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